| 성명서
WOW! 또다른 세상을 공감하며
우리는 모였습니다.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여성'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타자화 된 이름인 '여성', 그것은
우리를 온전히 설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장애여성이며, 성소수자 여성이며 '국민'의 이름을 거부한
여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언어를 필요로 하고 있고 동시에 다른 방식의 행동을
서로 다른 속도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여성'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여성'을 딛고, 앞으로의 '여성'이 담아낼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고 또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WOW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 '국민'이라는 보통 명사 속에 장애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수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피해자이자 평화의 행위자로서의 여성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원한 적 없던 이름들로 불리우며 존재하고 있었지만 결국 보이지 않는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여성 성소수자의
문제가 노동자의 문제로 치환되기도 하고 장애여성의 문제가 남성 장애인의 문제 뒤로 밀려나고 있었으며 '국민'의
이름 속에서 여성은 언제나 보호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겐 우리 자신의 언어가 절실합니다.
타인의 언어로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 낼 때 우리는 타자화 되고 삭제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로 '가족'을 되짚어 볼 것입니다. 언제나 평화가 넘치는 가족,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가족. 그러한 가족 개념안에는 장애여성으로서,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한 '국가' 안에서 '국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여성으로서 꾸리고자 하는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하고 있으나,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다른 세상
그래서 우리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장애여성과 여성 성소수자는 '정상적인' 한민족-대한민국-가족의
구성원으로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가 되고자 하지 않으며 가사노동과 비정규직
노동에 감정노동까지 수행해야 하는 완벽한 아내가 되는 것을 우리의 이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가족 안에서
여성에게 강요되고 있는 이러한 것들을 수행할 수 없음, 혹은 수행할 의지가 없음은 우리를 '쓸모 없는'
혹은 '비정상적인' 존재로만 머물게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또다른 세상은 '가족'의 구성원이 아닌 온전한 '나'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삶, 여성 성소수자와
장애여성이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인정되는 삶입니다. 폭력적인 '정상'의 기준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공감
'또다른 세상'은 서로의 공감을 필요로 합니다. '공감'은 자신을 드러낼 때 가능해 집니다.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일 때 가능해집니다. 서로를 공감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그러나 완벽한 이해, 완벽한 공감을 목표로
하진 않습니다. 장애여성의 문제와 여성 성소수자의 문제,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삶과 문제의식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르지만, 다르다는 이유로 처음의 시도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비주류
여성으로서 우리가 겪고 있는 '닮음'을 '공감'할 때 경험했던 그 삶에 위안을 얻고 그것을부터 나올 수
있는 그 힘을 우리는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모인 것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감을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모인 것은 나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가 '똑같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문제 역시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나의 문제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위함입니다. 섣불리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동정과 호기심의 눈이 아닌 공감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공감은 한번의 악수와 한번의 눈인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공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다름으로 닮은 힘을 만들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해를 말하지 않고 이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이름이 아닌 앞으로의 '이름'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2004년 3월 8일 다름으로닮은여성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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